금융/인플레이션

인플레이션(5)

스엠 2022. 10. 6. 13:04

지은이 하노 벡, 우르반 바허, 마르코 헤르만

옮김이 강영욱 

2부 누가, 왜 인플레이션을 만들고 이용하는가?

5장 예고된 재앙, 초대형 인플레이션

01하루아침에 세계의 운명이 바뀌다

-"하룻밤 사이에 체리가 익었다!" (독일 주간지의 표제 였는제 급격한 화폐개혁 이후 바로 경제가 좋아진 것을 표현하는 것)

15년동안 정권을 잡고 있던 나치가 세계대전에 채전한 직후 라이히스마르크는 가치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화폐 가치를 상실하였다. 

사람들은 물물교환의 방식으로 물품 거래를 이어갔다. 

나치 정권은 인플레이션을 억제시키기 위해 엄격한 가격 통제 및 가격 동결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가격 동결을 하더라도 결국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1948년 6월 20일 화폐개혁이 시작되었다.

명목가치 57억 도이치마르크의 은행권 지폐가 시중에 투입되어 시민들의 지갑 속으로 들어갔다. 

식량 배급소 앞에는 수백만 명의 독일인들이 길게 줄을 섰다. 

식량배급표를 제시하고 40라이히스마르크를 새로운 화폐 도이치마르크로 바꾸기 위해서였다. 

예금액이 있을 경우 라이히스마르크 대 도이치마르크 를 10 : 1 비율로 교환해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금이 많을수록 손해였기에 시중에 유통되던 구 화폐 라이히스마르크의 94%가 회수되었고 현금 자산 중 예금액은 6.5%만 남았다.

패전국으로 가난에 시달리던 독일은 화폐 개혁이 성공하고 경제 기적을 마침내 이룰 수 있었다.

 

-독일 경제의 황금기

1950년대 도입된 도이치마르크로 인해 독일은 20년도 채 안되어 경제 강대국 반열에 올랐고, 독일의 경제모델은 다른 나라의 모범이 되었으며, 도이치마르크느 기축통화가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순항을 하진  않았다.

초기에 물가와 실업율은 상승했지만 임금은 그대로였다. 

1948년 통화개혁와 에르하르트의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총파업이 일어났다.  정부의 경제정책은 소액 예금자가 대부분인 국민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소액 예금자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과 다를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르하르트는 끈질기게 버텻고 임금동결 조치가 총파업 이전에 철폐된 덕분에 1949년 봄이 되자 물가는 하락하기 시작했고, 도이치마르크가 평가절하 되면서 수출경기는 호황을 이루었다. (참고로 평가절하/평가절상은 고정환율제도일때 쓰는 말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자율변동 환율제이기 때문에 상승 하강 이라는 말이 더욱 맞는 말이다.)

 

02세기의 경제 사상가들

-고정경제학에 대한 반박 

케인즈가 등장하기 전에는 고정경제학이 경제 이론을 지배하고 있었다.

고전 경제학파는 "공급은 수요를 스스로 창조한다"(세의 법칙)라는 원리를 가지고 경제 위기가 원천적으로 불가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 경제 위기가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은 폐쇄된 순환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세의 법칙 : 경제전체적으로 봤을 때 일단 공급이 이루어지면 그만큼의 수요가 자연적으로 생겨나므로, 유효수요 부족에 따른 공급과잉이 발생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세는 소비하지 않은 저축도 기업의 투자 재원으로 모두 쓰여, 모든 소득은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 구입에 쓰인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시장은 언제나 균형상태를 유지한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존 메이너트 케인즈는 1929년 세계대공황을 겪으면서 경제 위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세의 법칙에서 오류를 발견하고 맹렬이 비난한다.

이유를 막론하고 소비자가 수입을 전부 지추하지 않거나 이자 수익을 얻기 위해 은행에 저축하는 일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즉 돈을 그냥 움켜쥐고 아예 지출을 하지 않으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에는 기존의 생산 제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 것이다. 

생산자가 가격을 인하하지 않고 생산량을 줄인다고 하자. 결국 수요 부족으로 인해 실업이 발생한다. 

만약 케인스의 진단이 옳다면 경제정책으로 금융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 

 

-경기를 급상승시킨 법

1950년대만 해도 독일 정부는 소유권,자극,자유시장, 경쟁을 기본적으로 인정하는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체재를 표방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케인지언의 정책을 도입하면서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경기를 통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1966년 0.1%였던 실업률이 2%로 올랐다. 

이에 정부는 수요 부족이 원인이라며 공공지출을 늘려 부족한 수요를 메꿔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결과 놀랍게도 실업률은 줄어들었고 독일의 경제는 안정기를 찾을 수 있었다.

케인스식 통제 정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필립스곡선의 거북한 메커니즘

1960년대 독일뿐만 아니라 영미권 국가에서도 케인즈의 정책을 도입하고 있었다. 

경제학자들은 대담한 실험정신으로 성공을 꿈꾸며 컴퓨터 신기술을 이용해 거대한 국민경제 모델을 제시하며 경제정책을 경영문제로 강등시켰다. 

케인즈파 경제학자들은 엔지니어가 부품을 갈고 닦으며 엔진을 고치듯이 경기침체와 경제위기를 다루려 했다. 

이러한 사고를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의 상관관계로 표현한 것이 "필립스 곡선"이다. 

필립스 곡선에 의하면, 경제가 활성화되면 고용이 증가하고 수요가 부족하면 물가가 상승한다. 

이러한 필립스 곡선에는 거북한 메커니즘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필립스의 곡선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물가가 상승하고 기업의 이윤이 증가해도 임금은 인상이 되지 않아 노동자의 구매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즉 노동자의 실질 임금이 떨어지는데도 노동자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임금이 오르지 않는 덕분에 회사를 고용창출을 할 수 있게 되고 실업율을 떨어지게 된다. 

당시 정치인들은 이러한 거북한 메커니즘을 보지 못하고 필립스의 곡선에 매료되어 인플레이션을 고의적으로 상승시켰다. 

이처럼 1960년대 세계 경제정책을 지배했던 정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경제 이론은 전지전능해 보이는 신무기를 공급하고,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을 맞 바꾸려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1960년대는 경제 정책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정치적 유용성만 따지던 시절이었고 이러한 행동은 부메랑이 되어 더욱 안좋은 상황을 몰고 왔다. 

 

03석유 파동과 스태그플레이션

-70년대를 떠도는 인플레이션 유령

1970년대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격동의 시기였다.

50년대는 제한적으로, 60년대는 대체로 안정적인 성장률과 온건한 인플레이션을 보였지만, 70년대에 접어들자 우려할만한 상황이 터지고 말았다.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이 모두 상승하고 성장이 멎었다. 이러한 흐름은 199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를 총결산하면 물가가 프랑스는 15%, 이탈리아는 25%, 스페인은 28%로 상승하는 등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고인플레이션을 겪고 있었다. 

고인플레이션과 고실업률이라는 2가지 조합이 만들어졌으며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필립스곡선을 퇴출시킨 주범

전 세계 정치인들과 경제이론가들은 필립스 곡선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며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렇게 스태그플레이션은 필립스 곡선을 경제 이론에서 퇴출시켜버렸다. 

스태그플레이션 자체는 잘 알다시피 석유의 상승으로 시작되었다. 

1973년 원유 1배럴당 3달러 였지만, 1979년 1배럴당 38달러까지 폭등하였다.

케인즈주의에 입각한 경제정책을 추진했던 국가들에서 경기가 과열되고 수요가 급증하고 생산능력은 한계에 달하며 인플레이션이 상승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생산량이 증가하는데 인플레이션이 인플레이션은 지속적으로 상승하였다. 

이유는 선진국에서 생산하는 제품의 주원료 중 하나가 원유였기 때문이다. 

1973, 1979 두번의 석유 파동으로 인플레이션과 대량 실업 사태가 발생하였다. 

물론 석유만이 스태그플레이션을 발생 시킨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미국은 무모하게 베트남 전쟁을 벌이느라 빚더미에 앉았고, 독일은 케인즈주의에 입각해서 경제위기 대응 방안으로 지출 위주의 정책을 추진해왔다. 

그런 지출 위주의 경제정책도 그 효과가 신통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밝혀낸 자가 있으니 시카고의 작은 거인(키 155cm) 밀턴 프리드먼 되시겄다.

 

04금융정책이 주도한 세계 경제의 안정기

-필립스곡선에 반기를 든 남자 

케인즈주의자들이 국가의 지출 정책과 경기 부양책을 강조한 반면, 신자유주의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더 작은 국가, 더 많은 자유, 국민들의 더 많은 결정을 부르짖었다. 

프리드먼은 필립스 곡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노동자들이 처음에는 실질 임금의 감소를 못 알아채도 결국에는 임금 인상을 요구할 것 이며, 임금 인상으로 인건비가 상승하면 기업의 고용 의향이 감소한다는 것이다. 

199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루카스는 프리드먼보다 한발 앞서 만약 노동자들이 인플레이션을 예견하고 선 임금 인상을 요구할 수 도 있다고 보았고, 더 높은 임금 인상을 요구했는데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임금과 실업률만 증가한다고 주장했다. 

잘못된 예측이 한 나라를 경기침체로 몰고 갈 수 있음을 통찰한 루카스의 주장을 탁월하다 .

1970년대에는 스태그플레이셔, 높은 인플레이션율과 실업률이 나타나고 국가의 경기 개입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며 각국은 빚더미가 쌓이기 시작했다. 

경제와 정치에 관한 사고가 전환되고 새로운 원칙이 절실히 필요했다. 초대형 인플레이션의 폭풍이 지나고 세계 경제는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경제 안정기의 원인

1980년부터 2007까지 세계의 거시경제는 잠잠해졌다. 

전문가들은 대 안정기로 접어든 원인을 다양하게 분석한다. 

선진국의 GNP에서 서비스 영역 비중 증가로 인한 경기안정, 정보 기술의 발달, 재고 관리 주기 감소, 공급 상황 개선 위주의 정책 증가를 대표적인 원인으로 꼽았다. 

1980년대 공급경제학을 바탕으로한 보수주의 정책을 레이거노믹스 혹은 대처리즘이라고 하며, 각국은 감세정책과 민영화를 추진하고 자기책임과 시장의 유연성을 자오했다. 

그러나 대 안정기의 핵심은 금융정책이다.

중앙은행은 엄격한 원칙을 세우고 이 원칙을 지키며 신뢰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변화 대신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중앙은행들이 1980년대에 금융정책 원칙을 세웠다.

중앙은행은 정해진 비율로만 통화량을 증가시킨다는 원칙을 지키며 금융정책이 난관에 봉착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각국은 자기희생을 정책의 기조로 삼으며, 거침없는 stop and go정책( 국제수지가 악화되면 긴축조치를 취하고, 그 결과 경기가 호전되면 긴축조치를 철폐하여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방법, 2차 세계대전이 후 영국이 이 정책을 반복 실시했다 )을 추진하는 대신, 국민이 증앙은행을 완전히 신뢰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 치중해 왔다. 

이러한 기대치 관리는 계획에 따른 안정성을 부여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대 안정기 금융정책에는 추카스의 사상이 직접적으로 반여되어 있다. 

하지만 금융정책은 인플레이션을 멈추는 것 말고 실업율도 잡아야 했다. 

성격이 다른 두 문제에는 두 가지 도구를 사용하는 경제 원칙 적용되어야 한다. "하녀 한명이 두명의 주인을 모실 수 없다"라는 틴버겐의 법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책 발행년도 2017년) 중앙은행의 공식 보도를 들으면 금융정책이 마치 기적의 방패라도 되는 듯, 두 명이 아닌 여러 명의 주인을 모셔야 하는 인상이 든다. 금융 정책이 기적의 방패가 될 수 있을까?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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